1. 트아와 비교에서 호불호를 따지자면 나는 트아가 훨씬 좋았다. 왜냐면 트아 배니싱과 초연 배니싱은 전혀 다른 극이기 때문에. 조금 비약해서 이게 연출관의 차이구나, 를 절실히 느낌. 트아가 의신과 케이 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초연은 각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됨. 물론 그 안에 셋의 얽힌 관계가 들어있지만 그 시선이 몹시 냉소적이다. 보는 내내 계속 이 셋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양면성을 뛰어넘어 이기적 존재 그 자체인 인간들을. 모두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한다. 트아에서 케이와 의신이 서로를 위해 한 번씩 목숨을 던진 것과 달리.트아에선 의신과 케이가 서로를 이해하는 어느 지점에 다다랐고 미지 역시 그들을 이해하며 끝이 났는데 초연은 이해를 갈망하지만 결국 타자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단 결론처럼 보였다. 저 피부를 뚫고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상황이 세 번 반복되며 각자 그 상황으로 뛰어들었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각자의 선택을 한 느낌이 강했음. 트아 배니싱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컴컴하지만 서정적이었는데 초연 배니싱은 뮤 프랑켄에 지킬 세 스푼...! 의신과 케이의 관계가 빅터와 크리쳐로 보이는 건 왤까요... 넘버 구성이나 스토리 흐름도 의신의 감정에 더 많이 맞춰져 있어서 그의 연구가 너무 부각됨. 예를 들어서 트아에선 케이가 의신을 문 다음 의신이 케이를 무시하고 혼란에 빠져 제 연구만 계속할 때 케이가 한쪽에서 우두커니 홀로 앉아 의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의신은 날 보지 않는다. 의신은 날 보지 않는다. 그리고 햇빛 속으로 같은 경우도 트아에선 제일 처음 케이가, 극의 중반에선 의신이, 그리고 마지막엔 둘이 함께 결말을 맞이하며 '나의 밤'이 아니라 '우리의 밤'은 끝없이 이어져왔어, 를 부르게 된다. 그게 그 둘의 이해 지점이고 그 긴 시간이 둘을 어떻게 엮어줬는지, 그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시점까지 온 것을 이해하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성연출이 반복된 장면들에서 말하고파고 했다는, 300년 된 뱀파이어와 3년 된 뱀파이어와 갓 뱀파이어가 된 세 각자의 '존재' 이야기가 된 느낌. 이번 시즌의 그들은 서로 각자 너무 외롭다. 아주 잠시 같이 걸었을지언정 영원히 그들은 각자 피부 너머로만 서로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보는 내내 트아가 많이 그리웠다. 트아라고 완벽한 극은 아니었고 그당시에도 구멍 숭숭이라 욕 많이 먹었는데 내가 좋아했던 분위기와 내가 좋아했던 관계는 지금의 배니싱에는 없더라고. 순정만화에서 소년만화로 바뀐 기분. 그래도 그나마 관대 덕분에 납득간 부분들은 있지만...



2. 명렬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 의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 케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너무 오래 살아왔고 그러다 그가 의신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케이에겐 의신이 가장 중요하다. 관대에서 민진케이의 저 답변들이 그래서 좋았다. 케이에게 의신이 가장 중요한 까닭.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비로소 다시 삶이라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의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이기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명렬은 의신을 고발하고 의신은 케이를 버려둔 채 제 연구에 몰두하고 케이는 의신을 물고 또 의신을 두고 죽겠다고 한다. 혼자 영원히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면서도. 그게 이 극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끝까지 각자의 입장에 서있다. 피부 아래 같은 피가 흘러도 각자의 외로움은 오로지 각자의 몫이다. 케이, 의신, 명렬 세 개의 외로움. 어떻게 보면 각자의 캐릭터성은 확실히 초연이 더 강하긴 하다. 



3. 트아는 케이의 사건이고 초연은 의신의 사건이다. 트아에선 미지가 등장하고 미지가 관조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미지는 케이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입장이니 몹시 당연하게도 케이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극이 됐다. 반면 초연은 의신이 연구를 하는 과정들에 케이가 얽혀든다. 그래서 의신의 시간에 따라 사건이 서술된다. 그래서 트아에선 케이의 감정이, 초연에선 의신의 감정이 더 잘 드러나는데 케이가 원하는 건 의신과 함께 있는 시간들이었고 그래서 극 전체가 더 서정적이었다. 반면 초연에선 의신이 연구에 성공하기 위해 고뇌하는 시간과 사건들, 명렬과의 부딪힘이 더 드러났고 그덕분에 지킬과 뮤 프랑켄을 소환하게 된다. 긴 시간의 흐름도 없었기 때문에 의신에게선 외로움도 사실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얘도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학교에서도 괴짜로 소문나 친구도 명렬이 밖에 없는, 아마 분명 외로움이 있는 아이였을 텐데 그런 감정이나 트라우마는 서정적인 시선이 아니라 연구에 미친, 괴짜 과학자의 원동력으로만 작동한다. 트아에서 의신도 부모님을 잃고 할머님 손에 자란 아이였고 몹시 효자였으며 학교에선 수석, 병원장 딸과 약혼, 심지어 미국으로 국비 유학까지 가게 될 완벽한 인물이라 명렬이 '의신이 형 부럽다'를 노래했었는데 반면 그에겐 서정이 주어졌다. 명렬이 틀어박힌 의신을 찾아와 전해주는 말들. 할머님이 돌아가겼다거나 그의 개인사가 하나씩 무너져가는 이야기들. 이런 게 트아와 초연을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명확하게 드러나서 와, 이게 연출관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인물이 부각되는 지점들이 너무나 다른 것.


 그래서 여전히 너무나 아쉬운 건 트아에서 제일 좋았던, 점층적으로 둘의 감정이 쌓이는 과정들이 초연에선 너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는 것. 글쎼, 나는 만약 재연이 온다면 다만 몇 년의 시간이라도 흐르는 장면들을 더 보여줬으면 좋겠다. 트아에선 오히려 그 시간들이 굉장히 고요해서 지루하단 평이 많았는데 초연에 오니 지킬 같은 넘버들이 막 쏟아지고 의신이가 세미 컨프롱을 하고... 사람이 죽고(살인 살인 한밤중에 살인 살인!!) 의심하고 의심받고 사건들이 되려 와르르 몰아쳐서 감정선이 드러날 시간은 없음. 그걸 배우들이 채우곤 있는데 그렇다고 부족한 텍스트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트아의 점층적인 감정선(제일 처음 자살을 시도하는 케이와 만나는 의신, 자신을 두고 떠날 것 같은 의신 때문에(의신은 같이 가자고 했으나 그럴 수 없으니) 너에게 연구할 시간을 더 주겠다며 그를 물어버린 케이, 케이에게 화가 나서 그를 쳐다보지 않는 의신, 본능을 못이겨 피를 탐한 후 정말 인간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케이에게 돌아간 의신, 의신과 케이의 행복한 한 때, 긴 시간, 명렬과의 대립, 백신을 버리고 의신과의 죽음을 택하는 케이)에서 그 그루터기, 여름 밤, 그 분위기... 를 사건들 사이에 적당히 섞어서 다시 볼 순 없을까...? 트아에도 끝나고 남은 건 케이와 의신이라는 캐릭터 뿐이었는데 초연도 비슷하게 되려나 싶기도 하고. 여하간 이 케이랑 의신이랑 캐릭터의 케미과 관계성은 두고두고 팔릴 만하니 부디 더 좋은 방향으로 각색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솔직히 보면서 내가 막공주에 봐서 다행이라 생각했음. 공연 오픈하고 나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기억하고 있기에. 공연을 마지막까지 만들어간다는 건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니까. 내가 성연출 취향=내 취향이라고 외쳐오긴 했지만 그 취향을 잘 표현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파수꾼, 이라는 말을 했을 때 아! 하고 어떤 방향을 원했는지 납득은 했는데 파수꾼이 명작으로 뽑히는 건 그들의 감정선을 몹시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뤄냈기 때문이다. 그런 섬세함이 부디 배우들의 연기가 아닌 텍스트와 연출로도 다뤄지는 다음 시즌이 되길 기대한다. 여하간에 나는 케이와 의신이 캐릭터는 이미 트아부터 너무 사랑했으므로... 하지만 여름밤 돌려조라... 나의 밤은 끝없이 이어져왔어, 그루터기에 앉아 노래하던 케이로 시작된 둘의 만남이 같이 그루터기 앉아 우리의 밤은 끝없이 이어져왔어, 라고 노래하며 둘이 함께라는 것에 더 방점을 찍어줬던 트아 버전의 감정선이 다시 꼭 보고 싶다. 여름 밤은 참 짧기도 하지, 의신이 던지는 이 말이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얼마나 다른 느낌으로 와닿는지도. 그루터기라는 것도 사실 단순히 인간의 것들과 섞인 자연의 존재, 뿐만이 아니라 그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이미 줄기는 잘려나갔지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케이와 의신이 같기도 해서 더 좋았었는데. 따흐흑... 나 트아 배니싱 사랑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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